‘판소리복서’, 묘하게 매력 있네 [씨네리뷰]

영화 2019. 10.09(수)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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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셀럽 김지영 기자] 판소리와 복싱이 만났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가지가 만나자 참신함이 탄생했다. 배우 엄태구의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할 수 있는 영화 ‘판소리복서’다.

9일 개봉한 ‘판소리복서’는 영화의 연출과 각본, 각색 등을 맡은 정혁기 감독의 단편 영화 ‘뎀프시롤: 참회록’에서 확장된 작품이다. 참회에 관한 내용을 주로 담았던 26분의 짧은 단편에서 잊히고 사라지는 것들을 더해 이야기가 풍성해졌다.

왕년에 챔피언까지 달성했던 복싱 선수 병구(엄태구)는 은퇴한 뒤 다시 복싱 명예의 전당에 오른 조지 포먼을 롤모델을 삼고 링 위에 서길 갈망한다. 그러나 아무도 찾지 않는 체육관의 관장이자 병구의 코치인 박관장(김희원)은 병구의 희망을 귀담아듣지 않는다. 병구는 챔피언 시절 무릎 통증으로 약을 복용했다가 도핑에 걸려 선수자격이 박탈됐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선수, 건강을 위해 복싱을 찾는 사람도 더 이상 없다. 단기간에 체중 감량이 된다는 홍보문구를 붙여야만 한 사람이 찾아올까 말까다. 한적한 동네에 체육관의 번영, 선수유치보다는 재개발 제의가 들어오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병구의 펀치드렁크 증상이 심해져 기억력이 혼란스러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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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꾼 것 같다”는 병구의 말처럼 시간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전개가 뒤죽박죽 섞여 있다. 그럼에도 놀라운 것은 영화의 관람을 방해하지 않고 묘한 매력을 자아낸다. 왜 병구가 그토록 복싱을 갈망하는지, 박관장은 왜 병구의 갈망을 귓등으로 듣는 것인지, 병구가 판소리복싱을 시작하게 된 계기, 이따금 씩 등장하는 지연(이설)과 병구가 어떤 관계인지 차근차근 설명되자 얽힌 시간의 순서와 캐릭터의 서사가 차례대로 머릿속에서 정리되는 마법이 일어난다.

실타래처럼 섞인 전개에서도 ‘판소리복서’는 영화의 주제를 잊지 않고 끝까지 끌고 간다. 사라져가는 병구의 기억, 회원 수가 5명 미만인 체육관의 토지를 이용해 재개발하려는 이와 그럼에도 체육관을 지키려는 박관장의 모습, 대중의 관심이 쏠린 UFC 대신 복싱, 사람들이 찾지 않는 사진관과 처분되는 필름, 체육관 내 고장이 났던 TV를 수리하던 기사가 “부품을 교체하는 것보다 새로 구입하는 게 낫다”고 조언을 함에도 “그래도 고쳐주세요”라고 기존의 것을 고수하고 대중음악에 밀려난 판소리의 위치까지. 모두가 잊혀지고 사라지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판소리의 장단에 맞춰 리듬을 타는 병구의 자세는 택견과 탈춤, 태극권 등을 연상케 한다. 영화를 보지 않고 ‘판소리와 복싱의 결합’을 듣는다면 생소하게 느껴져 주저하게 될 테지만 ‘판소리복싱’을 보게 된 순간 이는 기우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휘모리장단, 자진모리장단 등 신명 나고 빠른 장구 장단에 맞춰 들썩이면서도 날렵한 자세로 훅을 날리는 모습에 ‘눈이 손보다 빠르다’는 것을 확인케 하고 오글거림은 전혀 없고 몸 전체에 전율이 오른다.

독특한 자세와 복싱 권법이 우스꽝스럽게 보이지 않은 것은 엄태구의 노력이 상당하다. 전작들에서 선보인 날카로운 눈매와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어수룩하고 시골 청년다운 순수한 모습으로 일관했던 것과는 달리 복싱을 할 때만 강렬해지는 눈빛과 내면에서 발휘되는 힘으로 판소리복싱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만들어낸 듯 전문적이고 신선함을 추구했다.

특히 엄태구는 영화의 분량을 80% 이상 끌고 나감에도 전혀 벅차 보이지 않고 병구의 일대기이자 성장기를 쌓아간다. 여러 예능에서 지인들이 언급했던 것과 닮음 새로 어떨 땐 엄태구 자체의 모습이 보이다가도 ‘밀정’ ‘차이나타운’ ‘택시운전사’ 등 짧게나마 선보였던 강렬한 포스를 마구 발휘한다.

엄태구와 러브라인을 형성하고 있는 이혜리 역시 극을 무리 없이 끌어간다. 드라마 ‘응급하라 1988’에서 성덕선 자체를 표현했던 이혜리는 드라마 ‘딴따라’ 영화 ‘물괴’에서도 성덕선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해 악평을 자아냈던 터. 그러나 이번 ‘판소리복서’에서는 몰입을 깨지 않고 차분하고 수더분한 병구와 달리 매사 밝고 에너지가 넘치는 민지로 분해 로맨스의 호흡을 맞춰나간다.

미쟝센 단편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은 ‘뎀프시롤: 참회록’의 확장 버전인 만큼, 이번 작품에서도 아름다운 연출과 묘한 쾌감, 전율을 흐르게 하는 영화 ‘판소리복서’는 전국 극장가에서 만날 수 있다.

[김지영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 영화 '판소리복서' 포스터,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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